후르타치 고스케의 에너지가 바꾼 세상을 보면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어쩌면 비슷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고스케가 공학자의 시선으로 인류사를 에너지 여행이라 정의했다면, 세이건은 이 에너지 여행을 포함한 인류의 흐름으로 읽힌다. 에너지 관점에서 바라본 인류사에 대한 공부를 위해 고스케는 스스로 에너지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꾸몄으며, 후르타치 고스케라는 작가가 보여주는 기록을 보면서 어디서 왔고,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 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에너지가 깨운 호모 사피엔스??
칼 세이건은 우리가 별에서 온 원소들로 이루어진 ‘별의 먼지’라고 말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는 우주의 탄생과 별의 소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지구 역시 우주의 당당한 구성원이다. 이 거대한 우주적 연결고리 안에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여준다. 세이건은 코스모스에서 일본의 헤이케게 사례를 들며 ‘인위 선택’을 설명한다.
헤이케 게 란, 일본 단노우라 앞바다에 등껍질에 사무라이 얼굴 무늬가 있는 전설을 품고 사는 게(바다 식용 게) 이다. 바로 등껍질에 험악하게 찌푸린 무사의 얼굴이 새겨진 ‘헤이케게’다. 1185년 헤이케 가문이 멸망한 비극적인 해전 이후, 사람들은 이 게의 등껍질 무늬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은 무사들의 원혼이 환생한 것이라 믿었다. 어부들이 무사 얼굴을 닮은 게를 잡았을 때, 두려움이나 경의를 느껴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행위가 수 세기 동안 반복되면서 험상궂은 사무라이 무늬를 가지고 있는 게가 사람에 의해서 생존에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 냄으로써, 칼 세이건은 이 기괴한 무늬를 ‘인위 선택’이라는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명쾌하게 풀어냈다.
사무라이 얼굴을 덜 닮은 게만 식탁에 올랐고, 험상궂은 사무라이 얼굴을 닮은 게들만이 살아남아 번식할 기회를 얻었다. 결국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과 선택이 자연의 형질을 조각하듯 빚어낸 셈이다. 이는 인류가 더 많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뇌를 키우고 문명을 진화시킨 과정과도 맥을 같이 한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선택이 자연의 균형 속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헤이케게의 등껍질은 말 없는 경고처럼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사무라이의 얼굴을 닮은 게들이 어부들의 선택에 의해 살아남아 번식했듯, 인류의 진화 역시 무수한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선택의 핵심에는 언제나 ‘에너지’가 있었다.
후르타치 고스케는 인류 문명의 시작을 에너지의 발견으로 보았다. 그 첫 번째는 단연 ‘불’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불을 이용하면서부터 생존의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 뇌의 진화다. 인간의 뇌는 활동을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데, 불을 통해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소화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줄이고 대신 뇌를 키우는 쪽으로 진화했다.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 쪽을 선택했고, 그것이 문명의 시초가 되었다. 결국 뇌를 사용해 생존을 도모한 과정 자체가 인류 최초의 에너지 전략이었던 셈이다.
고스케의 주장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가 에너지를 활용해 진화해온 과정은 결국 인간의 철학과 닮아 있다고 한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물리적 행위를 넘어, 에너지를 어떻게 제어하고 효율적으로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인간만의 독특한 사유 체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칼 세이건이 말한 ‘자연의 신비로움을 지능으로 이용하는 인간’의 모습과 유사할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로서 자연이 내어준 에너지를 빌려 쓰고 있으며, 그 활용법을 익히는 것이 곧 인류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로의 진입은 태양 에너지를 인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대사건이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태양 에너지를 식량으로 전환하여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이는 마을과 국가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에너지를 다루는 기술을 가진 이들이 생겨나면서 계급이 형성되었고, 더 많은 에너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어두운 이면도 생겨났다. 에너지는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결국 에너지는 인류에게 생존의 도구이자 권력의 원천이었다. 세이건이 바라본 우주의 질서와 고스케가 추적한 에너지의 흐름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갈구하며 스스로를 빚어온 과정이다. 우리는 우주의 원소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자연이 준 에너지를 통해 지능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 자체가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철학이 되었다.
기술의 폭주와 에너지의 역설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삼림 에너지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산림은 인류에게 무한한 선물을 주는 듯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선물을 파괴해야 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졌다. 고스케는 이를 문명의 유지와 파괴가 공존하는 비극으로 묘사한다. 이후 산업혁명은 에너지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증기기관의 탄생은 인간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했고, 테슬라와 에디슨의 전류 전쟁을 통해 전기가 세상을 뒤덮었다. 효율적인 교류 방식을 주장한 테슬라의 승리는 현대 에너지 전송 시스템의 근간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너지는 식량 생산 방식도 통째로 바꾸었다. 과거에는 번개가 친 지역의 작물이 잘 자란다는 것을 경험적으로만 알았지만, 과학은 그 비밀이 질소 원자의 삼중결합을 깨는 에너기에 있음을 밝혀냈다. 결국, 하버-보슈 기법은 공기 중의 질소를 분리해 비료를 만들었고, 이는 인구 폭발을 가능케 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먹는 옥수수는 사실상 ‘공업 제품’이나 다름없다. 대량의 에너지를 투입해 재배된 옥수수가 가축의 사료와 인간의 식량이 되며 전 지구를 에너지로 뒤덮고 있는 것이다.
고스케는 자연의 모든 운동에는 규칙과 패턴이 있으며, 이는 에너지 보존 법칙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현대 과학은 운동, 위치, 열, 전기, 빛, 원자핵 등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를 정의하고 계측하는 데 성공했다. 뉴턴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에 멀리 볼 수 있었다”고 말했듯, 우리는 앞선 세대가 발견한 에너지의 법칙들 덕분에 현대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이 풍요 뒤에는 탄소 배출과 기후 변화라는 미래, 후손에 대한 청구서가 기다리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특히 작가는 자연계에서 가장 완벽한 에너지 시스템으로 ‘광합성’을 꼽는다. 광합성은 에너지를 저장하고 이용하며, 폐기물을 100% 재활용하는 완벽한 순환 시스템이다. 반면 인류가 만든 공업 시스템은 리듬을 잃어버렸다. 본능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원하는 우리 뇌의 욕망은 기계화와 맞물려 자연의 속도를 앞질러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며 달려왔지만 그 과정에서 지구가 가진 본연의 회복 탄력성을 훼손하고 말았다.
탄소 에너지 중심에서 태양 에너지 중심 사회로 가야 한다는 고스케의 주장은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IPCC가 제시하는 탄소 저감 노력은 산업적인 측면뿐 아니라 개인의 철학적 결단이 필요한 영역이다. 우리는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속도를 줄여도 삶에 큰 문제가 없음을 경험적으로 깨달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자연에서 배워야 할 것은 알맞은 속도이며, 끊임없는 성장이 아니라, 조절된 경제 활동과 느린 발전이 필요한 때가 온 것이다.
자연의 균형을 향한 선택, 2%
고스케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해법으로 ‘연 2%’라는 숫자를 제시한다. 이는 50년 동안 성목이 되는 삼나무나 노송나무의 성장을 1년 단위로 환산했을 때 나오는 수치다. 자연은 이미 가장 완벽한 밸런스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인류 역시 이 자연의 속도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성장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고스케의 관점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자연과 공존하며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결국 행복은 에너지의 양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에너지는 추상적이고, 철학 또한 추상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이라는 점에서 두 분야의 궁합은 매우 좋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강조했듯, 인류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이용해 문명을 일구었지만 동시에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모르는 자연의 균형은 이미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으며, 인류가 그 선을 넘지 않을 때 지속 가능한 시대를 만들고 그 시대를 후대에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다. 과거 생존을 위해 뇌를 키우고 에너지를 탐했던 우리가 이제는 지구 전체의 생존을 위해 욕망의 속도를 조절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고스케가 말한 ‘선견지명’은 바로 이것이다. 당장의 이익보다 50년 뒤의 삼나무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우리가 우주의 한 구성원임을 잊지 않는 철학적 태도가 필요하다. 앞으로 다가올 AI시대에서 자연의 밸런스 안에서 알맞은 속도로 살아가는 것은 인류가 성숙해가는 길이지 않을까 한다.
고스케는 이제는 경제 활동의 조절이 필요한 시점으로 얘기하고 있다. 무조건적인 성장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연의 리듬을 배우고, 그 안에서 우리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에너지가 바꾼 세상을 살아가는 호모 사피엔스의 마지막 과업일지도 모른다. 에너지는 우리를 살게 했고, AI시대에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스케와 세이건은 아마도 말하고 싶은 내용이 그 자연의 균형을 벗어나지 말고 지구의 거주자로서 우리가 내리는 현명한 선택들이 모여 진정한 행복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